대략 12세기 중반부터 13세기 말까지 한 세기 반은 다성음악에서 더욱 중요한 발전을 한 시기로, 일반적으로 아르스 안티쿠아Ars antiqua 시대라고 알려져 있다. 아르스 안티쿠아란 '구예술'이라는 의미로, 14세기 초의 이론가들이 아르스 노바 Ars nova(새로운 예술)라고 부르던 당시의 음악과 13세기 말의 음악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이다.
그러나 현대에서 1160년부터 1260년까지의 노트르담 악파 시기와, 13세기 후반 쾰른의 프랑코Franco von Koln와 페트루스 드 크루체Petrus de Cruce 시대의 음악을 총괄해서 아르스 안티쿠아라고 부른다.
이 시기 동안에 서양 음악사에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된다. 12세기 중반에 들면서, 그때까지 대체로 수도원 안에서 성장해온 다성음악의 주도권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중심으로 활약하는 음악가들에게 넘어갔고, 그로부터 150여 년에 걸쳐 파리는 유럽의 다성음악을 주도하게 된다. 특히 12세기 말은 다성음악 역사상 매우 중요한 시기로, 이떄 파리의 노트르담 악파에 의해서 오르가눔의 발전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그레고리오 성가는 단순한 병진행으로 중복시키던 다성음악의 초보단계를 지나서, 완전히 선율의 독자성이 부여된 다성부로 작곡되기 시작했다. 또한 복잡해지고 다양화되어가는 음악양식에 부응하여 많은 원칙들, 즉 리듬, 기보법 그리고 협화음에 대한 규칙 등이 완전한 체계로 공식화 되었다. 이 시대를 주도한 노트르담 악파의 음악활동은 서양 음악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큰 업적들을 남기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그들이 발전시킨 정확한 리듬 시가의 확립과 모드 기보법은 서양 음악의 습속한 발달을 가속화시킨 결정적인 용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 프랑스는 루이 7세와 그의 계승자인 필리프 2세에 의해 군주제도가 강화되고, 파리로의 집권화가 이루어졌다. 도로가 포장되고, 시 외곽의 성벽이 증축되며, 루브르 궁전의 건설과 노트르담 대성당의 재건립이 시작됨으로써, 파리는 카페 왕조의 통치 아래 프랑스의 수도로서, 유럽의 문화, 예술, 교육의 중심지로서 자리잡았다.
노트르담의 옛 로마네스크 성당을 새로운 고딕 성당으로 대체하는 계획은 1160년에 롱바르 파리 주교의 후임자로 부임한 쉴리가 추진한 것으로, 1163년 현 성당의 초석이 세워지기 시작한 이래 거의 90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1250년에서야 완공된다.
대성당의 재건립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현재 노트르담 악파라고 부르는 두 세대에 걸친 파리 작곡가들이 다성음악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들은 방대한 양의 전례용 다성음악을 작곡했으며, 특히 새로운 음악형식의 발전과 양식화에 두드러진 역할들을 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음악활동은 작자 미상이라든가 공동적 창조에서 벗어나, 독자적 성취나 개인적인 공헌의 새 국면으로 접어든다. 처음으로 중요한 작곡가들의 이름들이 두드러졌다.
노트르담의 대부분의 음악 레퍼터리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익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냉과 페로탱이라는 두 작곡가의 이름은 알려지고 있다. 레오냉은 12세기 후반에 파리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노트르담 성당과 생 브누아의 교회에 중요한 행정업무를 맡았던 사제이자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페로탱은 단지 레오냉의 후계자로만 알려지고 있다.
12세기와 13세기 파리의 음악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한때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던 영국인 유학생이 1270년에서 1280년 사이에 쓴 논문을 통해서, 당시 파리의 음악 역사와 레오냉과 페로탱, 두 작곡가들의 음악활동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중세의 음악 이론서들 중 많은 것들이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논문은 19세기에 쿠스마커가 출판한 초기 음악 이론가들의 논문 모음집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논문들 중 네번째로 실려 있어서, 논문의 저자는 편의상 Anonymous IV로 불린다. 실상 거의 한 세기나 지나서 씌어진 한 이론가의 증언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는 그의 논문만이 초기 다성음악 발전에 기여한 레오냉과 페로탱의 공적과 그들의 노트르담 성당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페로탱은 레오냉보다 한 세대 뒤인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걸쳐 활약했던 작곡가로서, Anonymous IV는 그를 최고의 디스칸트 작곡가로 묘사하고 있다. 페로탱은 레오냉이 세워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양식이나 형식면에서 더욱 확장,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2성부 오르가눔 대신에 3성부 또는 4성부로 작곡했으며, 레오냉이 기초를 세운 리듬 선법 체계도 더욱 확장시켜 사용했고, 독립된 클라우줄라와 다성의 콘둑투스도 작곡했다.
<오르가눔 대전>에 실려 있는 레오냉의 2성부 오르가눔을 보면, 합창으로 불리는 단성적 부분과 여러 명의 독창자에 의해 불리는 다성적 부분으로 구성된다. 또한 다성적 부분에서 두 가지 대비되는 양식이 사용됨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순수 오르가눔 양식으로, 장식 오르가눔처럼 테너 성부의 지속적인 음표 위에 자유롭게 흐르는 리듬으로 움직이는 상성부로 구성되었고, 또 다른 양식은 디스칸트 양식으로, 양 성부들이 리듬 패턴에 따라 정량적으로 움직인다.
2성부 오르가눔에서 순수 오르가눔 양식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디스칸트 양식을 사용할 것인가는 작곡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테너 성부에 차용된 성가의 선율 양식에 따른 일반적 원칙이 적용된다. 원래 성가에서 선율이 단음적인 부분에는 테너 성부가 긴 지속음으로 구성된 순수 오르가눔 양식을 사용하고, 성가의 선율 자체가 다음적인 부분에는 곡 전체의 길이가 과도하게 길어지지 않도록 테너 음들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디스칸트 양식을 사용한다. 디스칸트 양식으로 쓰여진 부분을 클라우줄라라고 부르는데, 노트르담 오르가눔의 리듬적 발전은 이 디스칸트 양식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페로탱 시대의 작품들은 레오냉 시대가 이루어놓은 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으로, 오르가눔의 기본 형식구조인 단성성가와 다성음악의 교대는 계속 유지되었지만, 양식화된 리듬 패턴을 다성음악 부분에 전체적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페로탱은 레오냉의 순수 오르가눔 부분을 디스칸트 양식의 클라우줄라로 대체하기도 했다. 지속되는 테너 음 위로 한없이 길게 늘어지는 상성부의 선율에 리듬 패턴을 도입함으로써 연주상 소요되는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고, 상대적으로 빠른 리듬 속에 연주되던 본래의 클라우줄라 부분과도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페로탱 시대에 많은 클라우줄라들이 레오냉의 클라우줄라를 대체하기 위해 작곡되었다. 이것을 대체 클라우줄라라고 부르는데, 같은 테너 선율을 기초로 길이가 다양한 대체 클라우줄라가 여러 개 작곡되었고, 연주자는 자신의 기호와 상황에 따라 적절한 것을 선택하여 부름으로써, 예배의식에 소요되는 시간을 조정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작곡가들은 서서히 클라우줄라를 오르가눔으로부터 독립된 악곡으로 보기 시작했다.
<서양음악사 100장면, 박을미 지음>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