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마뉴 대제가 로마와 프랑크의 성가를 통합시키고, 이 성가들이 9세기에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사용된 후에도 성가 레퍼터리는 계속 늘어났다. 특히 기보법이 확산됨으로 인해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상당히 많은 새로운 성가들이 기존의 레퍼터리에 추가되었다. 이 시기에는 더욱 숫자가 늘어난 성인들과, 성처녀 마리아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축일들이 엄청나게 증가함에 따라 교회력은 새로운 축일과 성인의 날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교회는 각 축연과 행사에 적합한 미사와 성무일도를 위한 새로운 성가들이 필요했다. 이들 성가들은 새로이 작곡되기도 했지만, 기존 성가에 가사나 새로운 선율이 첨가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중세 초기의 작곡가들에게는 평성가에 어떠한 첨삭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9세기부터 기존 성가에 새로운 가사나 음악을, 또는 가사와 음악을 함께 첨가하는 방식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런 방식을 트로프, 라틴 어로 트로푸스라고 불렀다. 트로프라는 용어는 원래는 언어를 장식하는 말투나 프레이즈의 모양을 의미한다. 미사에서 트로프는 입당송, 봉헌송과 영성체송 같은 고유문에, 그리고 신앙의 진술이라는 이유로 제외된 크레도 이외의 모든 통상문에 붙여졌다. 성무일도에서는 안티폰, 벌시클, 리스폰서리, 베네디카무스 도미노 성가에 자주 트로프를 붙였다. 9세기 초에 어느 전례학자가 별다른 설명이 없이 트로프의 존재를 기록한 것으로 봐, 그 시기에 트로프는 이미 통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로프 관행의 주요 중심지는 9세기와 10세기에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원 중 하나였던 스위스의 콘스탄츠 호반에 있는 생 갈 수도원과 남프랑스 리모주의 생 마르샬 수도원이었으며, 특히 생 갈 수도원의 투오틸로 수도사가 이 형식으로 작곡해 이름을 떨쳤다고ㅗ 알려진다. 트로프는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수도원들의 성당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12세기에는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트로프에는 가사만을, 또는 선율만을 첨가하거나, 가사와 선율을 함께 첨가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가사만 첨가되는 트로프는 기존 성가의 가사가 없는 다음적 패시지에 가사를 첨가하는 것이다. 새로운 가사적 트로프는 성가의 원래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주석을 붙이기 위한 것으로, 미사와 성무일도의 다음적인 음악에 대부분 적용되었다. 사실상 이 같은 가사의 첨가는 기존 가사의 설명적인 주석이라는 이유로 묵인되었다.
때로는 가사 없이 선율만 첨가되는데, 이런 트로프에서 새로이 첨가된 긴 다음적 패시지는 기존의 성가를 축일이나 특별한 행사에 적합하도록 더 화려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첨가된 선율적 패시지는 항상 새롭게 작곡되는 것만이 아니고, 다른 성가에서 선율이 취해지기도 했다.
세번째 트로프 방식은 성가의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신 새로운 가사와 음악을 기존 성가의 도입부에, 또는 행과 행 사이에 삽입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새로운 가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내용과 문법상 맞도록 배려하고, 선율 또한 원래 성가의 선행하는 선율이나 따라나오는 선율에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작곡되었다. 트로프된 부분은 대개 독창자가 맡고, 기존 성가 부분은 합창이 불렀기 떄문에, 트로프된 부분과 원래 성가 부분은 연주상 구별되었다.
9세기 중반에 알렐루야 성가에의 트로프로 시작된 시퀀스sequence, 라틴 어로 sequentia(부속가)는 이후에 알렐루야 성가와는 관련 없이 새로운 선율과 새로운 가사를 지닌 독자적인 음악형식이 되었다. 원래 알렐루야는 마지막 모음에 가사 없이 모음창으로 불리는, 긴 다음적 패시지가 있으며, 이 부분을 유빌루스(환희)라고 불렀다. 이 가사 없는 마지막 패시지가 더 긴 다음적 패시지로 확장되고(선율적 트로프), 여기에 단음적으로 가사가 붙여졌고(가사적 트로프), 그것은 곧 알렐루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악곡이 되었다. 처음에는 알렐루야의 유빌루스에 첨가된, 가사가 없는 긴 다음적 패시지를 시퀀스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이나, 이후에는 이런 과정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음악을 시퀀스로 부르게 되었다. 이 명칭은 시퀀스가 알렐루야 다음에 따라나오기 떄문에 '뒤따르다'sequor라는 라틴 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10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수천 개의 트로프와 시퀀스가 작곡되었다. 이는 중세의 음악가들이 정규 전례용 성가를 작곡하는 것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었던, 자신드르이 보다 자유로운 창작의욕의 돌파구를 트로프나 시퀀스 작곡을 통해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트로프와 시퀀스의 예술은 처음에는 수도권으로 제한되었으나, 곧 세속 교회로 흘러들어가게 되었고, 성직자들도 신도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라틴 어 미사의 노래하는 부분에 지방어를 사용하는 트로프 관행을 전례의식에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트로프 관행이 과도하게 인기를 끌고 너무 많은 수의 시퀀스가 난무하자, 교회는 트로프와 시퀀스의 발전을 전례의식의 종교적 성격을 위협하는 요소로, 그리고 오랫동안 교황들이 노력해왔던 전례의식의 전통적 통합을 교란시키는 저해요소로 보아, 트로프와 시퀀스를 전례의식의 공식적인 부분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1545년부터 1563년에 걸쳐 트렌토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세속적이고 불순한 모든 요소를 교회음악에서 배제시켜 전례의식을 가능한 한 원형의 모습으로 재현시켜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고, 전례에서 트로프를 완전히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시퀀스들이 사용됨으로써 그들의 전례 정신이 손상될 우려가 있다고 하여 네 개의 시퀀스, 즉 부활절의 '부활의 희생 제물을 찬양하라Victimae paschali laudes', 성신 강림절의 '오소서, 성신이여 Venti Sancte Spiritus', 성체 주일에 부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작곡의 '시온이여 찬양하라', 그리고 진혼 미사때 불려지는 '분노의 날' 이외의 다른 모든 시퀀스들은 공식적인 교회 전례에서 더이상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이중에 가자 잘 알려진 시퀀스는 첼라노의 프란시스코 회 수도사인 토마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분노의 날'로서, 나중에 레퀴엠 미사에 고유문의 한 부분으로 삽입되었다. 이 성가의 가사와 선율은 '죽음'이라든가 '최후의 심판'이라는 이미지의 모티브로서, 종교적, 문화적, 음악적 영역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어 인용되었다. 음악의 경우,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죽음의 섬', 리스트의 '죽음의 춤'과 '단테 교향곡', 그리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등,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