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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스 노바와 최후의 음유시인, 기욤 드 마쇼 1

by loeamom 2023. 5. 31.

14세기의 중세 유럽 사회는 앞서 초기 고딕시대의 상대적인 평온한과 번영에 비해 커다란 변동이 있었던, 그야말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12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교황권과 교회의 세력은 13세기 말부터 이미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정간섭이나 교황권의 우월성 과시 등, 교회의 지나친 야심이 오히려 교황권의 쇠퇴를 초래했고, 더불어 성직자들의 천직 사명감의 결핍과 세속적 권한 행사는 결국 14세기에 들어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더욱이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거의 70년에 걸친 교황의 아비뇽 거주는 로마와 아비뇽에서 각기 존립하는 두 명의 교황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하게 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켰다.

1409년, 이 분열을 수습하고자 피사에서 소집된 종교회의는 두 교황 모두에게 분열의 책임을 물어 폐위를 선언하고 새로운 교황 알렉산데르 5세Alexander(1409~10 재위)를 선출했지만, 두 교황이 종교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두 명이 아닌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1414년에 다시 콘스탄츠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1417~31 재위)를 선출했지만, 다른 교황들은 각기 사임하거나 폐위됨으로써 교권 분열을 어느 정도 종식시켰으나, 이 같은 기독교권의 오랜 분열은 교황권의 몰락과 함꼐 교회의 권위에 치명적인 훼손을 가져왔다.

한편, 프랑스와 영국 간에 왕위계승 문제와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발단된 '백년전쟁'(1337~1453)은 봉건제후의 몰락과 함께 중세 봉건시대의 막이 내리고, 왕권이 신장되어 중앙집권화의 경향이 촉진되는 결과를 낳았다. 흑사병이 1340년대와 1350년대에 유럽을 강타해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으며, 계속되는 흉년이 불행을 더하게 했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흑사병과 흉년 같은 거듭되는 재난에 따른 정치,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유럽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빈발했으며, 성직계급의 타락과 세속성에 대한 일반 신도들의 불만과 교황권 지상주의에 대한 반감이 심화되면서 중세 후기의 유럽 사회는 근본적으로 뒤흔들리게 되었다.

교회의 권위가 점차로 추락함에 따라 교회는 이제 지배적인 자리를 잃었고, 이러한 배경이 14세기의 문화에 전반적으로 반영되었다. 14세기의 중세는 현대 유럽국가들과 언어들의 계속적인 발생을 보았던 시기이다. 작가들은 당시까지 유럽 지식인의 공통어였던 라틴 어로부터 자국의 언어들을 문학적 표현에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주요 유럽국가들의 언어들과 자국어 문학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영국의 초서(1340경~1400)의 <캔터베리 이야기Canterbury Tales>(1386), 이탈리아의 보카치오(1313~75)의 <데카메론Decameron>(1353)과 단테(1265~1321)의 <신곡Divina Commedia>(1307)같은, 자국어로 씌어진 명작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특히 <캔터베리 이야기>와 <데카메론>은 덕성과 천상적 구원을 그리던 과거의 문학작품들과는 달리 생생한 사실주의와 세속적인 관능성을 그린 작품들로, 당시에 이미 예술적 자유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음을 역력히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14세기 초의 음악 이론가들은 앞서의 13세기 음악을 아르스 안티쿠아로 묘사하고, 14세기 초에 통용되기 시작한 새로운 양식을 아르스 노바라고 불렀다. 즉, '새로운 예술' 또는 '새로운 기술' 이라는 의미의 아르스 노바는 아르스 안티쿠아의 여러 면을 개혁하여 보다 자유롭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게 된 그 정신과 당시 유행하던 작곡기법을 가리킨다. 아르스 노바의 기수는 프랑스의 필리프 드 비트리Philippe de Vitry(1291~1361)로서, 그는 젊은 시절부터 파리의 왕실에서 자문관, 비서관으로, 그리고 후에는 외교관으로 활약했고, 1351년에는 교황의 추천으로 모Meaux의 주교가 되었던 작곡가이며 시인이자 음악 이론가였다.

아르스 노바라는 용어는 1322년에서 1323년 사이에 필리프 드 비트리가 쓴 음악 이론서의 제목이다. 필리프 드 비트리는 그의 책에서 14세기 프랑스 음악에 나타난 박자와 기보법의 큰 변화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특성들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13세기의 전통적인 구속들은 14세기의 진보적인 사회에서는 더이상 통용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양식상의 변화들은 아주 혁신적이었고, 당시의 모든 음악가들이 이 새로운 예술정신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보수적인 음악가들 사이에 이런 혁신적인 변화는 격렬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아르스 노바에 맞서는 몇몇 전통주의자들은 아르스 안티쿠아의 음악을 옹호하는 이론서를 내기도 했다.

아르스 노바 음악에서 새롭게 시도되었던 주 분야는 리듬으로서, 리듬에 관한 새로운 가능성들은 14세기의 음악에 무한한 복잡화의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13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음악은 획일적인 3분박으로 되어 있었으나, 14세기에는 3분박과 2분박이 동등하게 허용되었다. 그리고 아르스 안티쿠아 시대의 리듬 체계인 리듬선법은 좀더 복잡하고 다양한 리듬을 위해서 포기되었고, 모든 종류위 시가들, 쉼표, 당김음이 사용됨으로써, 과거보다 훨씬더 유연한 선율을 만들 수 있었다.

14세기의 아르스 노바는 그 이전의 작곡가에게 허용되었던 것보다 훨씬더 큰 리듬적 자유를 종교음악에도 주었고, 이제는 전례음악도 완전한 3분박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 같은 변화는 교황청을 긴장시킬 수밖에 없었고, 1324년 아비뇽에 거주하던 교황 요하네스 22세(1316~34 재위)가 교회음악에 급격히 나타나는 음악의 복잡성, 즉 세속성에 대한 우려를 표방한 교황 교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즉, 당시의 교회음악은 예배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므로, 최소한 성무일도와 미사 음악에는 다성음악이나 세속적 선율 같은 현대적 장식들을 철저히 제거할 것을 명령 했고, 평성가만이 교회의 예배에 유일하게 적절한 음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힘을 크게 잃은 상태였고, 게다가 새로운 양식은 억누르기에는 너무 인기가 있었기 떄문에 교황의 선언은 대체로 무시되었다.

세속음악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이 시기에는 교회음악보다 세속음악이 훨씬 많이 작곡되었다. 이제 가사는 라틴 어가 아닌 자국어로 씌어졌다. 선율은 가장 상성부에 놓여졌고, 성부들의 선율적, 리듬적 독립성으로 향한 경향은 강화되었으며, 리듬적 복잡성도 14세기 말에 다가가서는 정점에 달했다. 그리고 어떤 성부도 교회의 전례성가의 선율을 굳이 차용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교회의식을 위한 다성음악은 아직도 공식적인 성가의 전통과 권위에 어느 정도 묶여 있었지만, 세속음악은 그런 면에서 훨씬더 자유롭고 진보적이었다.

 

<서양음악사 100장면(1), 박을미>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