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명사의 상당 기간 동안 음악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로마 카톨릭 교회였다. 교회는 후원자의 역할 뿐만 아니라, 교육의 터전이나 연주회장으로서도 봉사하는 주요 음악기관이었다. 수천 개의 선율들이 교회의 다양한 의식들에 사용되었으며, 이 선율들은 초기에는 구전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보존되었고, 음악이 기보될 수 있었던 이후에는 필사본들에 기록되어 교회와 수도원에 의해서 보호되었다. 그러나 중세에 '음악 만들기'는 결코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음악의 발전과 더불어 1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비종교적 또는 세속음악의 성장이 급격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교회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육성되고 세심하게 보존되었던 교회음악과는 달리, 세속음악은 그것의 보존에 관심을 가질 만한 기관이 없었기 떄문에 상대적으로 소수의 음악만이 현존하지만, 회화나 문헌, 고문서 등의 자료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에 많은 세속적 음악들이 작곡되고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속음악은 중세 궁정생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중세 귀족들에게 음악은 시와 춤과 더불어 오락의 형태로 배양되었다. 특히 수많은 새로운 시와 음악들이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남부 프랑스의 트루바두르오ㅘ 북부 프랑스의 트루베르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현재 남부 지방어인 '랑그 독langue d'oc'으로 씌워진 트루바두르의 시들은 대략 2,600여편이 현존하며, 북부 프랑스 어인 '랑그 드와일langue d'oil'로 씌어진 트루베르의 시는 2,130여 편이 남아 있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의 유산은 주로 그들의 활동이 대체로 끝나간 이후에 제작된 필사본들에 나타나며, 더욱이 그들이 보존에 신경을 쓴 것은 음악이 아니라 시 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노래의 일부만이 기보되었고, 그나마도 기보된 것들 중 상당 부분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선율들은 시에 비해 매우 적엇, 트루바두르의 경우 약 264편의 시에 모두 315개 정도의 선율들이 현존하고, 트루베르의 선율들은 1,420개가 남아 있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라는 용어는 '발견자' 또는 '발명가'라는 의미로, 남프랑스 어 동사 'trobar'('발견하다' '찾아내다' 또는 '작시하다')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이 명칭은 이들 세속 음악가들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선율에 기초하여 작품을 만들어내는 교회음악가들과는 달리, 독창적인 선율들을 새로이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들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의 출신들로, 영주, 명문가의 교양 있는 귀족이나 기사, 가난한 가문의 성직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비천한 태생이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귀족계급의 특별한 후원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트루바두르 예술이 언제 시작되었는가는 확실치 않지만, 남부 프랑스의 푸아티에Poitiers 백작이자 아키텐의 공작인 기욤Guillaume d'Aquitaine을 최초의 트루바두르로 보고 있다. 트루바두르의 예술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남부 프랑스에서 융성했으며,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최고조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음악이 함꼐 보존되어 남아 있는 트루바드루들은 42명 정도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은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 보르넬, 그리고 베르트랑 드 보른 등이다.
트루베르는 북부 프랑스에서 트루바두르보다도 약간 늦게 시작해서 12세기 중반부터 꽃피기 시작했다. 트루바두르의 예술이 북프랑스에 이입된 경위로는, 최초의 트루바두르로 칭해지는 아키텐의 기욤 공작의 손녀인 엘레오노르가 1137년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결혼하면서, 방타두르를 비롯한 몇 명의 트루바두르들을 북쪽으로 데려간 것을 가장 큰 요인으로 본다.
그후 1152년 엘레오노르와 프랑스 왕과의 결혼이 무효가 되고, 그녀는 다시 노르망디 공작인 앙주의 앙리와 재혼하게 된다. 결혼 후 앙리 공작은 영국의 헨리 2세로 왕위에 오르게 되고, 이 유명한 정치적 결혼으로부터 사자왕 리처드 1세와 실지왕 존을 낳게 된다. 유명한 트루베르로는 사자왕 리처드 1세를 포함해서 아담 드 라알, 나바라의 왕 티보 IV세 등이 있으며, 현재 약 200여 명에 달하는 트루베르들의 음악이 보노되어 있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들은 주로 작시, 작곡만을 했으며, 실제 노래와 연주는 직업적인 예인인 종글뢰르들에게 맡겨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트루바두르, 트루베르와 종글뢰르 사이에 작곡가와 연주자로서의 구별은 종종 분명치 않다. 트루바두르의 경우, 그들의 전기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데, 전기에서 사회적 신분이나 직업이 확실하게 언급된 백여 명의 트루바두르들 중 약 3분의 1이 종글뢰르(민스트럴)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자신들의 음악을 직접 연주할 수 없었던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들은 그들의 음악을 종글뢰르들에게 맡겼다.
종글뢰르란 마을에서 마을로 방랑하면서, 성채 안이나 술집 또는 마을 광장에서 요술이나 곡예, 카드 묘기, 훈련된 동물의 묘기 등을 보여주기도 하고, 무용담이나 사랑 이야기를 낭송하기도 하고, 가수, 악기 연주자 그리고 무용수 역할까지도 하는 예인들이었다. 이들은 신분이 보장되지 않아서 법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사회의 밑바닥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이들을, 노래를 통해서 '유독한 매력'을 전하며 기독교적 도덕성에 이교도 문화를 주입하는 위협자들로 보아 영성체와 성사에 참여하는 것조차 금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종글뢰르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작곡한 것을 노래하고 연주하는 떠돌이 예인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중세의 단성 세속음악 발전에 차지한 몫은 상당히 크다. 이들로 인해 단성 세속음악의 레퍼터리가 구전으로 전수되고 유포될 수 있었으며, 이후에 필사본에 기록되기까지 소멸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종글뢰르들은 간혹 민스트럴minstrel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종글뢰르의 문자상의 의미는 '마술사, 어릿광대'이며, 민스트럴에는 '기능인'이라는 의미도 있다. 결국 이 두 명칭은 같은 사람들을 칭하는 말로서, 종글뢰르는 일반적으로 경멸하는 의미롤 부를 때 사용되고, 민스트럴은 조금 격을 높여 부를 떄 사용되던 명칭이다.
<서양음악사 100장면(1), 박을미> 중 발췌